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할머니의 제일 첫 기억은 아마도 내가 다섯살 쯔음에 할머니와 미용실에 앉아서 뽀글머리 파마를 같이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할머니의 전형적인 한국 아주머니 파마를 보고 그게 예뻣던지 고집없이 자란 내가 할머니께 나도 파마 해달라고 때 썻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할머니 옆에 앉아 난생 처음으로 대한민국 아주머니 뽀글머리 파마를 하고 미용실 언니가 파마롯드를 풀때 좋아서 혀를 쑥 내밀고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이 난다.
나와 내 남동생의 손을 잡고 시장과 마켓에서 반찬거리 5,000원 어치를 사고 집에 가는 중 동생의 고집에 못이겨 18,000원 짜리 롤러스케이트를 사들고 집에 들어가시던 할머니 기억도 선선하다.
서울 사는 우리가 대구에 내려갈때마다 할머니가 직접 쑤신 쑥떡도 얼큰한 빨간 전구지 국도 생각난다. 크레파스와 스케치북, 햄버거, 짜장면..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은 아낌없이 배푸시고 사주신 할머니…
그런 할머니는 항상 절약하시고 아끼시고 매사 검소하게 사셨다. 할어버지 입으시다 떨어진 옷 꾀매어 할머니가 입으시고, 샘플로 받은 로션 사용하시고, 좋은 선물 받으셔도 교회에 불우한 성도들께 나누어 드리는 그런 분 이셨다. 그렇게 모으고 모으셔서 우리 가족이 미국 이민올때 힘들지 않도록 보태주셨다. 덕분에 목회자 자녀였던 나와 내 동생은 부유하진 않았어도 금전적인 이유로 힘들진 않았던것 같다.
어릴때 두 부모를 다 잃고 고아로 자랐어도 교회에서 하나님 열심히 섬기고 모든 이들에게 칭찬 받으시던 할머니께서는 교인이 맺어주신 선 자리를 통해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셨다. 6.26 전쟁 참전하셨던 할아버지를 만나시고 몇주 안돼서 곧 결혼 하셨다. 불교 중의 불교… 중이셨던 증조할아버지께서 선교사님을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신 후, 늦게 결혼 하셔서 할아버지 형제들을 낳으시고 신앙생활을 중요시 여기며 자녀 신앙 교육에 힘쓰셨던 덕분에 우리 할아버지는 결혼 하신 후 곧 전도사가 되어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는 사역자로 크게 쓰임 받으셨다. 그렇게 사모가 된 우리 할머니는 누가 봐도 겸손하게 말없이 사역자 남편을 내조 하며 3남2녀 자녀들을 혼자 양육하고 교회를 위해 항상 기도하셨다.
여러 교회 개척을 도맡아 여기 저기 부름 받으시고 항상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집에서는 성경말씀 읽고 설교 준비하시는 할아버지는 목사로서 100점이셨으나 아마도 남편으로서는 50점도 못 받으셨을것 같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받아드리고 묵묵히 속앓이 하면서 아내의 자리에서, 엄마의 자리에서, 그리고 사모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당하셨다.
하루는 구역예배 참석때문에 집에 계시지 않았을때 아빠의 5학년 남동생이 쥐불놀이 하다가 크게 화상을 입게 되었다. 중학생이었던 아빠가 동생을 업고 응급으로 병원에 뛰어 갔고 예배 후에 연락을 받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정말로도 처참한 이야기를 의사한테서 들어야 했다. 화상이 너무 크고 깊어서 바로 피부이식 수술을 들어가야하는데 너무 어린 아이라서 피부가 모자르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바로 자기의 살을 배어 사용하라 하셨고 수술을 기다리는 중 삼촌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들을 하나님 품으로 일찍 보내셔야만 했던 할머니는 내내 마음 한켠에 삼촌을 생각하고 마음에 묻으셨다.
아빠의 누나도 43살에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하나님께로 가셨다. 우리 고모… 할머니는 큰딸도 마음에 묻으시고 살아가셨다. 자녀를 잃은 아픔으로 성도들과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더 해아리고 이해하시면서 사역하셨다. 할아버지가 은퇴하실때까지 미소가 아름다우시고 정말로 착하신 사모님으로 계속 사역하셨다. 교회 사역 은퇴 후에는 구미에 있는 타교회에 경로대학 원장으로 할아버지가 섬기시고 할머니도 노인들을 위해 북놀이, 춤, 찬양, 만들기 선생님으로 봉사하셨다.
나는 미국에 계속 있었지만 할머니와 종종 통화할때 항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말씀과 기도생활 하며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하셨다. 나의 초, 중, 고, 대학교 졸업식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임마누엘 전도사와 교제할때 부모님 반대에도 할머니는 나를 응원해 주셨다. 부모님은 내가 사역의 길로 가는것을 반기지 않으셨지만 할머니는 사모 만큼 값지고 제일 행복한 일은 없다고 격려해 주셨다. 고령에 계실지라도 손녀 은진이 시집간다고 몸도 불편하신데 마다하지 않고 미국에 오셔서 임마누엘 전도사와 내 손을 꼭 잡고 축복해주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각 난다. 결혼식 바로 전날 할머니께서 내게 사모가 되면 힘들고 많이 외로울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라고 조언해주셨다. 남편은 나의 남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도 가끔 남편이 교회일로 집에 없거나 나 혼자 육아를 부담해야 할때 외로울때가 있지만 할머니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기억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남편을 위해 더 기도할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할머니의 경험과 노하우가 나를 조금 덜 힘들어 하는 사모로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치매가 시작되면서 할머니는 성경쓰기에 집중하셨다. 2018년 부터 2022년까지 성경을 창세기 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네번이나 필사 하셨고 할아버지는 공책이 한권씩 채워질때마다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 기록하시고 할아버지 서재 책장에 꽂아 두셨다. 이것을 보면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시고, 생각하시고, 아끼셨는지 알수 있다.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영상통화 할때마다 “누구세요?” 라고 물으셨지만 보실때마다 “아이고 참하네요~신앙생활 잘 하이소~” 라고 당부 하셨다. 내가 손녀인지는 까먹었지만…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고 항상 당부하시는 할머니 보면서 정말 나는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세상의 부유함 보다 더 값지고 중요한 신앙을 물려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10월 1일 할머니는 내부출혈이 있었는데 지혈을 못해 90세에 생을 마감하시고 소천하셨다. 급히 한국에 나갔지만 할머니를 보지 못했고 도착했을때는 할머니 영정사진 밖에 보지 못했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참여는 못했지만 발인예배와 하관예배를 같이 드렸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내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있었다.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넘쳤고, 할머니가 보고싶없지만 하나님 옆에 계실 할머니 생각하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십자가 보혈, 천국 소망,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죽음이 있을지라도 평안과 위로, 기쁨과 감사가 있음을 느끼고 또 느끼게 되었다. 할머니의 삶을 통하여 나는 사모로서의 사명을 다시 다지고 간직하게 되었다. 지금 남편과 사역하고 있는 이곳, 충현선교교회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하고 중대한 일을 감당하고 있다. 어린 영혼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고, 사랑하며, 순종할수 있도록 기도하고 지도하는 일에 더욱 더 힘쓰고 내 삶에 주어진 날들 가운데서 주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더욱 전념하는 사역자 부부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 한다. 다음 세대에도 신앙의 유산이 물려지고 믿음이 자라고 예배가 끊이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램이고 목적이다. 지금 부르신 이곳에서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되도록 순종하며 살아가겠다.